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1세 (문단 편집) == 기타 == * 영국인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미국 남부 [[버지니아]]에는 [[제임스타운]]을 세우고 북부에는 [[플리머스(도시)|플리머스]]를 세운 것도 제임스 1세의 치세 중 일어났던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이미 여왕의 독신에서 이름을 딴 버지니아 식민지가 만들어졌으나, 당시 건설된 정착지인 [[로어노크 식민지|로어노크]]는 모종의 이유로 전멸하고 폐허가 되어 1607년 제임스 1세 때 건설된 제임스타운이 사실상 미국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어노크 식민지는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소재하고 있으나, 당시 세워진 버지니아 식민지는 오늘날의 [[버지니아 주]]보다 훨씬 경계가 넓었고, 나중에야 이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여러 주가 분화해나왔다. 참고로 오늘날 버지니아 주에 존재하는 도시인 로어노크는 역사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로어노크 식민지와 관련이 없다. 이쪽은 단순히 근방에 로어노크 강이 흐르기에 붙은 이름이다.] 통념과는 달리, 영국의 북미식민지는 딱히 [[국교회]] 정책을 강요한 제임스 1세의 탄압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었는데, 북부식민지는 [[개신교]] 일파인 [[청교도]]들이 간섭을 피하고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건너온 게 기원이지만, 그보다 먼저 세워진, 제임스타운을 비롯한 남부식민지는 단순히 식민지 경영으로써 수익을 얻고자 추진된 것이었다. 당연히 이 개척단의 출항은 제임스 1세가 허가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정착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었다. [[http://kalnaf.egloos.com/2359144|#식민지 미국의 이민/개척 역사]] 이전부터 [[스페인]] 등이 중남미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며 여러모로 재미를 보았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도 식민지 개척까지는 아니더라도 북미를 탐험하고 교역을 해오면서 식민지 경영에 대한 전망과 수요가 발전해오는 구조 속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뿐이다. 북부의 경우도 딱히 국왕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북부식민지도 주류는 매사추세츠 만 회사가 설립한 자치식민지였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설립되자 합병되었고, 주변의 코네티컷이나 뉴햄프셔 식민지 등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분리되었거나 독자적으로 개척하여 사후 승인을 받은 곳들이었다. 종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매사추세츠를 떠나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를 세웠다. 제임스 1세 시기 종교정책은 국왕 본인의 정치력과 친화력을 통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양쪽의 주류 기성 엘리트는 본인이 추구하는 카톨릭식 교구제 하드웨어-개신교식 소프트웨어란 방향 중심으로 이끌어 모으고, 여기에 도저히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는 소수의 전통 가톨릭과 더 많은 개신교 매파는 다른 세력들을 동원해 조지는 게 기본 정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조진다.'라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겁만 주고 중앙 권력에서 밀어낸다는 것이지 그 이상 물리적으로 사형이나 강제추방을 때리면서 사회적 차원의 강제적인 교법화 정책(confessionalization)을 미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니 아메리카로 간 청교도들이나,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었던 장로교 매파들이나 불만은 많아도 어쨌든 왕실 권력에 대놓고 반항할 힘은 없지만 어쨌든 훗날을 도모할만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구도에서 저런 통치술의 핵심인 기성 봉건 사회 주류를 국왕이 추구하는 정책 중심으로 끌어모을 정치적 매력이 없었던 찰스가 후임으로 들어오니 그 주류 파워 엘리트들이 제임스 시절엔 쩌리였던 급진세력 쪽으로 넘어가면서 영국 내전이란 참사가 터진 것이다. *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성직자들이나 독실한 청교도들이 싫어했던 각종 [[스포츠]]와 놀이문화를 장려하였다. 중세부터 [[사육제]]나 [[할로윈]]을 비롯한 여러 전통 문화행사들은 기독교 이전의 전통과 결합하거나 그것을 흡수하는 경우가 많아 이교도적이라고 공격받고는 했었는데, 이 시기에는 그러한 비판이 더 강하게 제기되었었다. 이에 백성들이 금제에 맞서 법으로써 이를 보호해달라고 청원하였고, 제임스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또한 제임스 1세가 사실은 꽤 지지세가 있던 왕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http://kalnaf.egloos.com/3347888|#잉글랜드 스포츠 문화의 시련기]] * 국민들에게 [[성경]]을 보급할 생각으로 영어판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로서는 제법 참신한 아이디어였고, 또한 이때 편찬된 킹 제임스 성경은 큰 성공을 거두어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또 사랑받고 있다. 세간에선 성경 인쇄 과정에서 생긴 해괴한 오류 때문에 가끔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제임스 1세가 아무 생각없이 나라를 다스린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국정과 잉글랜드가 굴러가는 미래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성경은 [[영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영어 자체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킹 제임스 성경]]의 기틀 위에서 풍성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글로브(지구) 극장을 "국왕 극단"으로 임명하며 팍팍 밀어줬고, 사실상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특히 맥베스에는 스튜어트 왕가에 대한 사심이 팍팍팍 들어있다. --근데 왜 엘리자베스 때는 희극이고 이 시대는 비극인거냐?-- 사실 비극이 쓰여진 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의 가족사 탓도 있다. * 철저한 '''혐연가'''로 1604년에 세계 최초로 [[금연]] 정책을 실현했고, 담배에 대해 '폐에 위험한 천한 관습이자 추잡한 유행'이라고 했다. 담배의 해로움을 잘 모르던 과거임을 감안했을 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시대를 몇백년이나 앞서간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담배]]는 당시 한창 개척이 진행 중이던 버지니아 식민지의 유일한 수입원이었기에 [[식민지]]의 담배 경작을 막지는 못했다. * 최초의 경마장인 '뉴마켓'을 열었다. * [[일본]]의 [[에도 막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일본식 갑옷]] 2개를 선물받기도 했다. 이 중 하나는 [[런던 탑]]에 보관되어 있다.[[https://c2.staticflickr.com/4/3137/3004851444_246aee5a7c_b.jpg|#]] * 아내인 [[덴마크의 아나]]과 사이가 안 좋았으며, 성격이 강한 앤과 자주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결혼생활이 어찌나 최악이었는지 한 공식 기록에서 '결혼이란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이 있는 왕 중 하나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보면 나오듯이[[https://en.wikipedia.org/wiki/James_VI_and_I#List_of_writings|#]] 재임 중 젊고 잘생긴 남성들을 곁에 두었다는 말이 있다. 제임스 1세가 아낀 미남자 중 한 명은 [[조지 빌리어스]]란 인물로, 제임스 1세는 그에게 버킹엄 공작의 작위를 하사한다.[* 삼총사의 바로 그 버킹엄 공작이다.]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왕의 침소를 관리하는 것이었다고. 버킹엄 공작에 대한 제임스 1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냐면 공식 무도회에서 자신의 부인과 춤추는 버킹엄 공작을 보고, 질투심이 폭발한 제임스 1세가 '우리 조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By God, George, I love you dearly!)'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나 레녹스 공작 에스메 스튜어트와의 염문설도 있었다. 에스메 스튜어트 같은 경우엔 제임스 1세와는 워낙 어릴 때 만났고 애초에 명가 출신이어서 스캔들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로버트 카의 경우 버킹엄 공작과 더불어 그리 대단치 않는 가문 출신이 워낙 벼락출세해서 세간에 뒷말이 무성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속 인물의 성 지향성 논란은 죽은 인간이 되살아나 커밍아웃하지 않는 이상 역사속 사료를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역사학자마다 말이 달라 이성애자다 동성애자다 확언하기 어렵다. 그 예로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제임스 1세가 만든 Basilicon doron에서 동성애를 죄악으로 명시하기도 했고, 자기 부인과 7명이나 되는 애를 낳았다고 하니... 심지어 버킹엄 공작과 나눈 말들 중 현대어로는 연애적으로 표현되는 단어가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non-sexual 표현의 단어이기도 했다고 한다. * 놀랍게도, [[한국사]]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영국]] 군주다. 그의 치세 중에 [[잉글랜드]]의 [[해적]]들이 [[조선]] 해안을 [[약탈]]하려고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돌던 풍문같은 것도 아니고 《[[광해군일기]]》에도 실린 기록이다. 해적선이 조선 [[해군]]의 막강한 화력에 놀라 도망가면서 배를 나포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당시의 군관들은 유럽제 [[선박]]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군함]]이나 상선으로 자주 이용되었던 [[갤리온]]이라고 추정된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도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함대로 추정되는 [[잉글랜드]] [[해적]]들이 [[조선]]을 공격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해도 드레이크의 세력은 왕실의 영향력 밖에 있었으므로, [[한국사]]와 연관된 최초의 [[영국]] 군주는 제임스 1세다.] 다음은 해당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비변사에 전교하기를, "호남(湖南)에 온 적의 배가 어떤 배인지는 모르지만 1척도 잡지 못하였으니 나랏일을 알 만하다. 황 역관(黃譯官)을 보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피하기만 하려고 이러쿵저러쿵 논의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렸다. 내가 아무리 날마다 하교하여 천만 번 말해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매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는 말로 책임을 때우려고만 하니 경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찌 이런 것이겠는가. 오늘의 나랏일이 비록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의 병이 위독한 것을 보고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핑계대고 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서쪽과 남쪽에서 들어오는 보고는 다 근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비변사에서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경들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후로는 나의 뜻을 잘 받들어 더 빨리 처리하여 나 혼자만 위에서 걱정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사도진(蛇渡津) 앞바다에 들어온 것을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편전(片箭)으로 쏘았다. 적이 우리 나라 사람 8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일본에 당도하여 편전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조선의 작은 화살이 배를 거의 절반이나 뚫고 들어갔으니 활을 잘 쏜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마 서양 배였을 것이다.】 - 《[[광해군일기]]》 정초본 179권, 광해 14년 7월 19일 계축 1번째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407019_001|기사]] || * 1608년에 제임스 1세 자신이 직접 재판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당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에게 거부당한 적이 있다. 1608년 11월 14일 웨스트민스터 홀에 영국의 모든 판사를 모아놓고, 판사들은 왕의 대리인이므로 왕은 어떤 사건이든지 판사의 관할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신하에게 재판하게 할 수 있다고 선언했을 때, 당시 판사였던 에드워드 코크가 “바로 이곳에서 모든 판사의 명백한 동의하에 답하건대, 왕은 어떤 사건도 재판할 수 없고 법원만이 법과 영국의 관습에 따라 판단하고 재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제임스 1세는 “법은 이성에 기초하는 것이고 과인과 신하들도 판사들만큼 이성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코크는 “'''신께서 전하께 뛰어난 학문과 탁월한 품성을 부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영국의 법과 신민들의 생명·상속·물건·재산에 관계되는 권리 주장에 관해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주장들은 자연적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이성과 오랜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은 신민들의 법적 주장에 답하는 황금의 마법 지팡이이며 수단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제임스 1세는 “지금 과인이 법 아래에 있다는 말을 하는 거냐?”고 발끈했지만 코크는 “전하께서는 사람들 아래에 있지는 않지만, 신과 법 아래에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현대에 와서는 법을 판결하고 집행하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옹호하는 예화로 인용되곤 한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YXKX67G0C]] [[분류:스코틀랜드 국왕]][[분류:잉글랜드 국왕]][[분류:아일랜드 국왕]][[분류:올버니 공작]][[분류:스튜어트 가문]][[분류:1566년 출생]][[분류:1625년 사망]][[분류: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자]][[분류:킹 제임스 성경]][[분류:에든버러 출신 인물]][[분류:가터 훈장]][[분류:프랑스 왕위 요구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